4화 No woman, No cry

퇴근길 발걸음이 무겁다. 아무리 작은 회사라고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다는 마음이 든다. 영업 책임자는 무능해보이고 영업담당자는 기가 죽어 있다. 사내에서 의견을 주고 받는 방식은 완전한 K-에자일 방식의 단점으로 응집되어 있다. 아직 대표와 이야기를 제대로 해보진 못 했지만 여기까지만 페이지를 넘겨보아도 이미 견적을 내기에 충분했고 마음 속에서는 두 가지 입장으로 갈려 기싸움 중이었다.
상범의 내면1: 여기까지만 하고 그만한다고 말할까?
상범의 내면2: 뭐야. 2일만에 그만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상범의 내면1: 안되는 일은 안되는거야
상범의 내면2: 그냥 월급이나 타면 되잖아
상범의 내면1: 어떻게 월급이나 타고 있어. 한 번 일하면 제대로 하는 게 김상범 스타일이잖아'
상범의 내면2: 야. 너도 알잖아. 답 안나와. 그냥 시간이나 떼워.
상범의 내면1: 안돼. 그렇게는 못해. 그만하자.
상범의 내면2: 이게 다 네가 망해서 그런거야. 자업자득이지.
자업자득

머리가 띵한 것이 찬 바람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서 인지 아니면 이 상황이 처참해서 인지 구분이 안갔다. 정신없이 생각을 하면서 걷다보니 어느 새 현관문 앞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내가 환하게 반겨준다.
모해: 오빠! 수고 많았어요~
상범: 으...응
아내의 환한 얼굴을 보니 갑자기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는 자체가 스스로를 더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아내는 저렇게 환하게 웃어주는데 나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마음까지 아파왔다.
모해: 씻고 얼른 와요. 밥차려놨어.
식탁을 보니 잡채와 항정살이 차려져 있었다.

상범: 고마워요. 얼른 씻고 올게.
옷을 주섬주섬 벗고 욕조로 들어가서 샤워기의 물을 틀었다.
울고 싶었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내가 이렇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 본다. 헬지에서도 나는 잘 나갔었다. 그런데 어디서부터 일까? 무엇이 나를 이 곳까지 떠밀어냈을까?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생각은 깊이 들어가지 못 하고 마음 한 켠에서는 분노가 일어났다. 울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내가 이대로 죽나봐라...
모진 마음으로 식탁에 앉아 밥을 먹었다. 아내가 차려준 밥은 너무 맛있었다. 오늘 회사에서 있었던 일이나 방금 전까지 생각했던 고민들이 모두 연기처럼 사라졌다.
모해: 회사는 어때?
상범: 그냥 아직 알아가는 단계이지.
모해: 그래도 오빠는 금방 알아채잖아.
상범: 음. 솔직히 말하면 좀 할 일이 많은 것 같아. 오빠가 이번에 한 번 만들어 보려고.
모해: 그래. 오빠도 그럴 때가 되었지. 잘 할거야.
나는 아내에게 웃어 보였다. 그러면서도 어떤 것이 우리 가족에게 좋은 선택일지 머리가 복잡했다. 모진 마음을 먹고, 또 아내가 차려준 저녁 밥을 먹으면서 잊어버린 고민거리들이 다시 떠올랐다. 지금이라도 다른 곳을 알아보는 게 나을지 아니면 여기서 뭔가 해내는 것이 나을지 스스로를 계속 의심하고 또 의심하면서 퇴근 후 저녁은 지나갔다.
띠리리리...

남양주에서 출발해서 양재동까지 가려면 아침 6시 30분에 일어나야 출근시간에 맞출 수 있다. 나는 아직 익숙치가 않다. 잠이 덜 깬 상태로 대충 옷을 입는다. 문을 열고 나오니 찬 바람에 정신이 번쩍 든다. 이제 얼른 빨간 버스를 타고 잠실역에서 내려서 지하철로 갈아타야 한다. 지난 20년 간 나는 대중교통을 이용해 본 적이 없었다. 회사 통근 버스를 타거나 자차를 이용하는 삶에서 지하철과 버스를 타는 일상은 아직 적응이 잘 되지 않았다. 북적이는 사람들이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마치 대학생때로 돌아간 것 같아 신선한 마음도 들었다. 현재 상황을 객관화해보면 그래도 출퇴근길까지 분노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행이기도 했다.
잠실역에서 지하철을 타기 위해 통로를 걸어가고 있었다. 다들 바닥에 무빙워크라도 깔린 것처럼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다.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도 출근길의 새로운 재미이기도 했다.
저 사람도 나처럼 출근하기 싫을까?
저 사람은 표정이 썩었네...가기 싫은가 보다
나는 이렇게 가기 싫어하면서 왜 지금 출근을 하는 것일까?
돈 벌어야지. 돈 벌어야 해.
이런 회사 다니다가 내 커리어가 완전히 망가지는 것은 아닐까?
나는 어쩌다가 기회를 받지 못하게 되었을까?
그런데 어디선가 갑자기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충돌음이 들렸다. 내 잡생각도 충돌음과 함께 사라졌다.
탁. 탁. 탁. 탁. 탁....
청명한 소리에 나는 소리가 나는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
틱탁. 틱탁. 틱탁...
저 멀리서 어떤 젊은 여성이 다가 오고 있었다.

틱. 틱. 소리는 그녀가 가진 지팡이가 땅에 부딪치면서 나는 소리였다. 그녀는 시각 장애인이었다. 그리고 지팡이 소리와 리듬을 맞춰 그녀의 새빨간 하이힐이 바닥을 때리면서 경쾌한 탁!소리가 났다. 틱. 탁! 틱. 탁! 소리는 점점 나와 가까워졌고 나의 심장도 그 리듬에 맞춰 두근두근했다.
먼저 나는 그녀가 너무 어려서 놀랐고 그녀의 걸음이 너무 빠르고 당당해서 놀랐다.
그녀에게는 마치 시각이라는 기능이 걷는 데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것처럼 빠르게 나를 스쳐지나갔다.
나보다 더 빠르게 걷네.
빠르게 움직이는 출근 인파 속에 나만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고 그런 나를 비웃듯이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인파 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는 생각했다.
이상한 경험이다. 신이 있다면 마치 나에게 어떤 신호를 보내는 것 같다.
그래. 장애가 있으면 당연히 어렵겠지. 그렇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두려워 말자. 장애가 있는 나도 힘차게 걸음을 떼어 보자.
언젠간 나도 의심없이 걸을 수 있을거야.
모든 것이 분명해지고 머리가 맑아졌다.
셋째날, 나는 끝까지 가보기로 결정했다.
- 5편에서 계속
